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책을 읽는 사람마다 독서(讀書)의 목적과 이유는 각양각색(各樣各色)이겠지만, 내가 책 읽기를 좋아하는 것은 순전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기 위한 독서보다 지식과 기술을 익힐 수 있는 실용서적에 손이 더 많이 가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책을 통해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내가 책 읽기를 즐기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읽었던 책의 목록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내 책 선택의 기준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기 위한 책 읽기 보다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책 읽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록 통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설(序說)에서 이렇게 서설(絮說)을 늘어 놓는 것은 지금 이야기 하려는 책 ‘가고일, THE GARGOYLE : 불멸의 사랑 1, 2’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해 책 읽기를 즐기게 된 내 초심을 다시 떠올리게 해 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책 ‘가고일’은 직물(織物)같은 질감의 짙은 보라색 표지에 노란 장미 꽃이 그려진 표지 때문에 처음 책을 봤을 때부터 매우 인상적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표지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 솔직히 밝힐 것이 있다. 나는 책을 읽기 전까지 가고일이 무엇인지 모랐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상적인 표지의 노란 꽃이 가고일 인 줄 알고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고일은 꽃이 아닌 조각 상이다. 큰 성당의 지붕에 있는 날개 있는 괴물 상을 보통 말한다. 괴물의 이미지이긴 하지만 처음에는 신의 존재로 받들어졌다. 하지만 기독교가 위세(位勢)를 떨치자 가고일은 신에서 사신(邪神)으로 격하되고 성당 밖에서 망을 보는 역할에 한정되고 만다. 그리고 신에서 사신으로 격하된 가고일은 바로 책 속에서는 주인공 나의 모습이다.
책 속 나는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다. 술과 마약에 취해 운전하다가 일어난 차 사고에서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그래서, 화상의 과정과 그 고통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더 슬픈 것은 화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잃었다는 사실이다. 사고 전까지만 해도 매끈한 미남으로 잘나가는 포르노 배우이자 제작자였지만, 화상은 잘생긴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괴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 사고는 포르노 배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음경마저 빼앗아 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육체적 충격과 고통만큼 정신적 충격과 고통도 심했고, 그래서 자살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하다. 오로지 사살만이 내가 가야 할 길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외모가 뒤틀어져 버리고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어느 날, 3번 째 화상을 입었다고 이야기하며 마리안네 엥겔이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는 그녀는 1300년쯤에 있었던 그녀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 준다. 이렇게, 현재와 700년 전의 사랑 이야기가 책 속에서 함께 전개된다.
책 속의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는 함께 시작하고 함께 끝을 맺는다. 두 이야기 모두 기독교적 성격이 다분하다. 그래서 만약 내가 기독교 문화에 대해 더 친숙하고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책을 읽어 나갔다면, 책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책을 읽어가는 내내 머리 속을 맴돌았지만, 현재와 과거에서 함께 진행 되는 사랑 이야기를 읽어가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이야기의 마무리는 과거와 현재가 다르다. 과거에서는 마리안네가 나를 먼저 떠나 보냈다면, 현대에서는 내가 마리안네를 먼저 떠나 보내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책을 직접 읽어가면서 알아가는 편이 적당할 터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책 속 현재의 마리안네는 과거의 자신의 나의 사랑을 이야기 해준다. 거기에는 단테의 지옥편도 속해 있고, 흑사병에 걸린 아내와 함께 죽음을 선택한 이탈리아 대장장이 프란체스코의 이야기, 폭풍에 휩쓸려간 남편을 기다리는 절벽의 여인 비키의 이야기, 사랑을 지키기 위해 비구니가 되고서 산 채로 땅에 묻힌 유리 세공사 세이의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사랑보다 연인의 사랑을 죽음으로 지킨 바이킨 시귀르드르 같은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다. 재미있게도 과거와 현재를 포함한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전부 해피엔딩과 거리가 멀다. 나와 마리안네를 비롯해 프란체스코, 시귀르드르, 세이, 그리고 비키에 이르기까지 누구의 사랑도 행복하게 끝을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안네가 알려준 프란체스코, 시귀르드르, 세이, 비키의 이야기와 마리안네의 헌신적 사랑은 여전히 마약을 탐닉(耽溺)하는 책 속의 나를 탄테의 지옥에서 꺼내어 현실에 적응하게 하고, 인간적으로 한 층 더 성장하게 만든다.
또 한가지. 이 책 ‘가고일’은 시각적 묘사가 뛰어나다. 교통 사고가 일어나는 장면에서 시작해 그 후 병원에서 받는 화상 치료의 끔찍한 장면, 그리고 과거 속 여러 이야기 속 장면까지,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시각적 묘사가 뛰어난 대신 이야기의 호흡은 짧다는 것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다.
아주 오랜만에 재미있는 이야기 책을 읽었다는 기분에.
과감히 읽어보기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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